영진의 어둠 건너편 15동 14층에 명환이 살고 있다. 명환은 1년 전 아내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당시 임신 5개월이었던 아내는 즉사하고 명환은 한쪽 다리를 잃었다. 가해자에게 어마어마한 금액의 배상금을 받았지만 가족과 직장, 한쪽 다리를 잃은 명환은 목발은 짚은 채로 가해자의 가족들 앞에 나타났다. 그들이 사는 아파트 같은 동의 집을 사고, 길에서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그들에게 말을 걸고... 결국 가해자 가족이 견디지 못해 다른 집으로 이사 가고 나니 명환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한다. 명환의 집은 한 번도 불이 켜진 적이 없다. 명환의 집은 완전한 어둠이다. 어둠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다가 건너편 베란다에서 낭떠러지에 매달리듯 잠을 자고 일어나는 영진을 발견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결국 영진에게 말을 건다. 내 집을 가지라고. 나는 집이 필요 없다고.
미하일 바흐친은 카니발을 기다림의 과정, 기다림의 징표라고 말한다. 인류가 카니발을 추구하는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 즉,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와 갈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둠의 사육제」에서 영진과 명훈이 서로를 발견하고, 대화를 나누고, 어둠을 공유하는 시간을 두 사람이 다음 세계를 맞이하기 전에 '기다리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떠올렸을 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카니발이론의 얄팍한 이해 버전
- [이전] - 고난 / 어려움 / 벗어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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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육제] -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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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 변화 / 달라짐 / 추구하는
영진은 베란다에서 지내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의미를 깨닫는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유사 어머니인 이모와 그의 가족들에게 모욕을 당하면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관적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영진은 새로운 곳으로 이동한 준비를 한다. 일을 하고, 집을 알아보고, 조금씩 짐을 옮기고. 견디고 또 견디는 과정이 모두 기다림의 시간이다.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하기 위한 기다림. 그러므로 영진이 이모네 베란다에서 보냈던 날들을 사육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명환은? 명환의 시간도 기다림의 시간처럼 보인다. 죽음을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명환은 영진에게 다가가고,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고, 영진의 베란다를 방문하기까지 한끝에 마지막으로 죽음을 선택한다. 두 사람의 사육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선을 긋기 힘들 것 같다. 그나마 영진은 인숙 언니에게 배신당하고 이모네로 들어오면서부터 기다림의 시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명환은... 가해자 가족들이 떠나고 난 뒤부터일까?(그때부터 삶의 목표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교통사고를 당한 뒤부터였을까?(절대적인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이론은 지식의 양이 방대하고 전문적이어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한국문학 작품에도 카니발이론을 적용해서 분석하려는 시도를 발견했지만, 이론적인 설명을 전부 이해하는 건 무리였다. 조금이라도 감이 잡히는 부분들을 읽다 보니 카니발화된 문학의 특성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1)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드러난다, 2) 익살스러움/풍자/희화화가 드러난다, 3) 웃음이 바탕에 깔려있다, 4) 탈권위적/전복적이다, 5) 현재화되고 대화체 방식이 많다... 이런 요소들 중에서 몇 가지는 「어둠의 사육제」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영진과 명환이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 강렬하게 나타난다. 특히 웃음 소리에 대한 기괴한 묘사가 인상적이어서 따로 메모해 두었다. '신음 소리 같은 웃음'(p.123), '발작적인 웃음'(p.124) 같은 표현은 어둠 속에서 명환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러나 입꼬리는 올라간 채로 기괴한 웃음을 짓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고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상상하게 만든다. 그 외에도 영진과 명환의 관계가 탈권위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현대화된 대화체 방식으로 전개되는 부분이 많지만 나머지 특성들이 모두 잘 드러나는 건 아니었다. 카니발이론에서는 풍자와 해학, 익살스러움과 희화화가 중요한 요소인 것 같은데 「어둠의 사육제」를 읽으면서 무거운 이야기가 가볍게 탈바꿈되고 풍자와 해학을 느낄 수 있었나 생각해 보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카니발이 그 자체로 양가성을 띤다는 설명은 「어둠의 사육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어둠의 사육제」에서 명환이 교통사고 가해자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양가성이 가장 잘 드러난다. 명환에게 그 사람은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죽이고 한쪽 다리를 앗아간 명백한 가해자였다. 그렇지만 명환이 사고 이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 사람을 지켜보고 "괜찮은 사람이었고.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소. 그 자가 썩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p.122)이라고 말하는 순간, 악함과 선함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절대적인 악함과 절대적인 선함은 없고, 한 사람 안에 모순된 가치들이 공존하며 언제든지 전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환의 입을 통해 선언되었기 때문에 「어둠의 사육제」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도 다시 살펴볼 수 있게 된다. 과연 인숙 언니는 악하기만 한가. 영진은 '삶과 화해하는 방법을 잊'었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같은 맥락에서 명환의 죽음도 양가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둠만이 명환의 표정'(p.134)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어둠이 절대적인 비관/악/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보다 나는 「어둠의 사육제」의 마지막 장면 - 영진이 명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덤덤하게 새로운 집으로 이동하는 장면에서 영진이 명환의 죽음을 예상했었더라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갈 길을 가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카니발이론에 관해 자료를 찾아보던 중 이런 문장들을 읽고는 「어둠의 사육제」의 마지막 선택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카니발은 근본적으로 죽음과 탄생이라는 우주적 원리에 지배되어 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죽음이면서 동시에 탄생을 내포하며 탄생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내포한다. 즉 하나는 다른 하나를 내포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두 가지의 시각을 가지며 양가치적이다. 모든 부정성은 동시에 긍정을 내포한다. 그리고 카니발의 이러한 양가치성은 무엇보다 미래를 향해 있다. 예를 들어 죽어가는 개별적인 몸을 기록하는 죽음의 이미지는 탄생하는 또 다른 몸의 귀퉁이를 보여준다. (중략) 지옥의 이미지 역시 부정된 것과 심판 받은 것, 과거의 것으로 현재에는 적합하지 못한 것, 낡고 불필요한 것을 담고 있으나 동시에 새로운 삶, 새로 태어나는 미래의 귀퉁이를 보여준다.”
- 박건용,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과 문학의 카니발화」 p.287
「어둠의 사육제」는 어둡고 절망으로 가득 찬 인물끼리 만나 더욱 깊이 어두워지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사육제'라는 제목에 걸려 관련된 철학적 사유를 찾아보면서 어둠을 양가적으로 이해하고, 두 인물의 시간을 사육제로 해석할 수 있었다. 영진과 명환이 공유한 시간이 그들의 인생에서 어둠의 시간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어둠'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 영진의 어둠과 명환의 어둠이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것처럼 영진의 선택과 명환의 선택도 완전히 다르지 않은 것. 사육제를 마치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영진의 미래 안에는 명환(과 인숙 언니)의 죽음도 함께 담겨있는 것. 그제야 의미가 와닿는 문장들이 있었다.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 밤들에는 이런 순간을 믿지 못했었다. 마치 밤이 깊을 때마다 새벽을 믿지 못하듯이, 겨울이 올 때마다 봄을 의심하듯이 나는 어리석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이다."(「여수의 사랑」 p.25) "가장 지독한 어둠이 가장 확실한 새벽의 징후임을 나는 수차례 보았다."(「어둠의 사육제」 p.126)
한강 작가의 작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빛과 하얀(흰)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책을 읽으면서는 빛만큼 어둠을 많이 접했다. 『검은 사슴』도 아주 긴 어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명도만 다를 뿐 영진이나 명환처럼 어둠의 표정을 짓고 있다. 제목에도 어둠(검은)이 들어가고 소설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테마들(광산, 사진, 바다...)이 모두 어둠과 관련 있다. 『여수의 사랑』에서는 그래도 단편들이어서 인물의 어둠을 슥- 보여주고 어느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면 『검은 사슴』은 400페이지가 넘도록 각자의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이어서 이렇게 깊은 어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했었다. 그런데 「어둠의 사육제」에서 '어둠'과 '사육제'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면서 『검은 사슴』도 또 다른 어둠의 사육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어둠과 빛은 다르지 않다고, 결국은 하나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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