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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을 읽으면서 '어머니의 부재'라는 주제에 매달렸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주제는 작년 하반기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고양이 밥을 챙겨주다가도, 요리를 하다가도, 수영장에서 샤워를 하다가도, 자전거를 타다가도, 이제 막 자고 일어났을 때도... 주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온전히 혼자 시간을 보낼 때마다 불현 듯 떠올랐다.
시작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였다. 지인들과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함께 읽으면서 19세기 영미 여성 작가의 작품세계를 분석할 때 어머니의 부재가 자주 언급된다는 걸 깨달았다. 19세기에는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거나 출산 직후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했고 평균 수명도 지금보다 짧았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부재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다루는 작가들이 실제로 당면한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로서 이 주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전에, 21세기 독자에게 어머니의 부재를 고민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일까?
학창 시절 두 가지 질문을 쥐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중 하나가 '나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었다.**** '엄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되고, 아마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아이를 낳고 육아까지 하는 모든 과정을 할 수 있는지를 포함한다. 공책의 빈 공간에 이 질문을 크게 적어두고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매달렸다. 주변의 어른들을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그리고 되고 싶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에서 포함한 모든 과정을 해내는 엄마들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 딴짓처럼 느껴지는 이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이 질문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몰라 불안해하는 10대 여자아이에게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1세기 독자로서 이 주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할 때 샌드라와 수전이 어머니의 부재를 생물학적인 죽음에 한정 짓지 않고 비유적인 의미까지 포함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읽으며 방향을 잡았다. 예를 들어 19세기 영미 여성 작가의 문학작품에 드러나는 여성 인물들을 실제로 어머니가 돌아가셨거나 살아있더라도 교육을 받지 못하고 가정 내에서 유령처럼 존재감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를 경험한다. 전자와 후자를 모두 어머니가 부재한 상황이라고 보면 혈연관계로서의 어머니가 실존하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 위치, 어머니 자리가 채워져 있거나 비워 있는지가 중요하다.
어머니 자리의 부재를 생각하면 대표적으로 어머니 자리를 두고 두 여성이 싸우는 경우가 떠오른다. 예를 들면 고부갈등. 아이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보호받고 믿고 싶어 하는 두 존재가 서로를 경계하고, 아이를 권력의 상징물처럼 여겨 뺏고 빼앗으려고 할 때, 아이는 어머니 자리에 누구를 앉혀야 할지 모른다. 어머니 자리가 하나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자리여도 되고,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져도 된다는 걸 알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머리로 생각할 수 있게 되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다).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싸움이 해결되지 않은 채 오래 유지되는 건 결국 그 자리가 비어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영원히 경쟁하기. 이것이 어린 시절 다년간의 관찰로 체화한 여성과 여성의 기본 관계였다.
여성으로 성장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고 배우는 자리가 부족하다는 사실도 어머니 자리가 부재함을 말해주는 좋은 사례인 것 같다. 나는 친구들보다 조금 늦은 6학년 때 생리를 시작했는데, 지금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리대 사용 방법을 배웠다. 이런 식으로, 이렇게 펼쳐서 쓰는 거야. 잘 때 생리가 새어나오는 현상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컨디션에 따라서 생리혈의 상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와 같은 실질적인 정보를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몰랐다. 대부분 또래문화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성교육 시간을 통해 피상적으로 배웠다. 생리는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섹스, 임신, 출산, 육아를 비롯해서 여성의 몸이 어떻게 해석되고,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없었다. 이 경우 자리의 부재는 정보의 부재, 정보의 부재는 정보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정보의 불균형은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거나 열등한 위치에 자리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시작한 질문에 매달려 『여수의 사랑』까지 건너오면서 어머니의 부재가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질문을 거듭할수록 개인이 부족하거나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사회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자리를 두고 둘 이상의 여성이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정한 정보가 은폐되거나 일방적으로 계승된다면 누구에게 유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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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수의 사랑』을 순서대로 한 번, 그리고 거꾸로 한 번, 이렇게 두 번 읽으면서 소설 속에 담겨있는 90년대 한국 사회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부재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여성 작가가 쓴 작품을 젠더, 그것도 어머니라는 필터로 읽는 것이 너무 편협한 관점의 읽기일수도 있다는 걸 안다. 알면서도 그렇게 읽고 싶다. 왜냐하면 한강 작가가 한강현이라는 필명으로 등단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여성 작가가 성별이 특정되지 않는, 즉, 여성처럼 보이지 않는 필명을 방패 삼아 글을 쓴 행위에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된 한강현씨의 당선 소감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래 숨겼던 비밀이 탄로났다.' 이 문장도 편협하게 오독해볼까. 오래 숨겼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을 오랫동안 숨겨야 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것은 한강현씨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라 더 많은 인물, 예를 들어 소설 속 인물*****이나 동시대를 살아간 여러 인물들도 간직했던 비밀이 아닐까?
** <문학기행 - 한강의 여수의 사랑> 링크 : https://youtu.be/XBzGRTr6ZEs?si=VzWvdWSyFjmccPi5
*** '여수 소제지구 택지개발 사업'으로 찾아보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여수시에서 직접 진행하는 공영개발 방식으로 3천 세대 이상이 거주할 수 있는 여러 시설과 공동주택 단지를 조성할 계획인데, 특정 업체 밀어 주기와 횡령 등의 혐의로 2024년 12월 여수시장이 입건되어 수사 중이다.
**** 다른 하나는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였고 이 고민의 결과는 『하루의 책상』에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시작도 해보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저울질한 결과였다. (중략) 내가 먼저 나를 막았다.' (『하루의 책상』, p.21)
***** 「붉은 닻」의 동식은 몇 번을 읽어도 K-장녀의 이야기로 읽힌다. 한강현이 원래는 한강이었던 것처럼 동식도 원래는 동은(또는 동미, 동애, 동이...)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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