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레터]는 원래 책을 읽고 느꼈던 감상이나 생각을 일기처럼 적어내려간 [바다]와 책을 읽는 동안 작성했던 독서노트 기록 모음인 [육지]로 구성했습니다. 3월 상현달 레터에서는 『검은 사슴』을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바다]와 [육지]가 함께 교차되는 지점을 따라걷는 느낌으로 옮겨보았어요. 그동안 함께 보내드린 독서노트 기록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넘어가서 조금 아쉬웠는데, 이번 레터에서는 책을 읽는 동안 기록한 메모들 중에서 아직도 여운이 남아있는 부분을 길어올려서 자세하게 펼쳤습니다. 하나의 독서 경험이 다른 경험과 연결되길 바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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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으며 소리없이 멀어져가는 허공의 푸른빛을 향하여 나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저 푸른빛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둠의 속으로, 태어났던 곳으로, 태어나기 전의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일까." - p.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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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은 검은 프라이팬 위에 떨어뜨린 살덩어리를 보고 조용히 진절머리를 치는 ‘나’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어떻게 보아도 「여수의 사랑」의 ‘정선’처럼 보였다. 「여수의 사랑」은 정선이 여수로 내려가는 장면(여수에 도착한 기차에서 내리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검은 사슴』의 인영은 의선을 찾아 황곡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인영에게 바다가 중요한 의미인 것도 「여수의 사랑」에서 언급되었던 바다의 상징적 의미들과 연결된다.
의선은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못하는 존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버지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고, 의선이 태어난 이후에도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여수의 사랑』에 실린 「진달래능선」에서도 기록되지 못한 존재를 다루고 있다. 혼자 상경했던 정환이 뒤늦게 고향으로 내려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으려고 했을 때, 기록되지 못한 존재였던 두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검은 사슴』의 시작부터 『여수의 사랑』과 포개어지는 부분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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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그를 당황하게 한 사실은 인영이 무작정 그 여자를 거두어 같은 방에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 p.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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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공간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공간’이라고 부르면 굉장히 크고 넓은 공간까지도 떠올리게 되는데, 그 단어를 ‘방’이라고 부르는 순간 내밀한 무엇을 공유하는 행위로 바뀐다. 내 방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얼마나 큰 의미인가.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이 공유해야 한다면.
‘나만의 방’을 가지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릴 적에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함께 방을 써야했고, 대학생 때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여러 명의 룸메이트와 지냈다. 모두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생각해보면 방을 공유하는 행위의 첫 번째 단계는 경제적인 이유인 것 같다.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이 그러했듯이. (방에서 베란다로 바뀌었지만 「어둠의 사육제」에서도 경제적인 이유로 공간을 공유해야 했다.
그러나 인영이 의선을 망설이지 않고 자기 방에 들이는 것은 어떠한 계산이 없다. 소설을 끝까지 읽으면 인영이 평소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러면 질문이 조금씩 더 깊어진다. 인영은 왜 의선을 자기 방에 들였을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닫았던 인영이 왜 의선만 받아들였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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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서 찾아보려 해도 남다르게 예쁜 구석이라고는 없는, 누군가 후천적인 매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면 그때서야 어렴풋하게 떠오를법한 얼굴이었다."
- p.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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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을 읽으면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여성의 외모를 묘사하면서 ‘평범하다’, ‘예쁜 구석이 없다’라고 묘사하는 문장을 읽는 것이 도대체 몇 번째인지. 한강 작가의 전작을 순서대로 읽으면서 동시에 19세기 영미 여성 작가들의 작품도 읽어나가고 있는데, 국적도 시대도 다른 여성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여자 인물의 외모를 ‘눈에 띌 만큼 예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장면을 자주 만났다. 『검은 사슴』에서도 이런 장면을 만나니 이런 외모 평가(절하)를 기분 나빠하고 넘길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됐다.
여자 주인공이 예쁘지 않다는 사실이 왜 중요할까? 첫 번째로 떠오르는 생각은 여성 서사에서 인물의 외모가 뛰어나지 않다고 설정했을 때 조금 더 많은 여성 독자들이 인물의 이야기에 몰입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다. 이야기 속 여성 인물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는 스타일이라면 그를 비현실적인 인물로 이상화하거나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선을 그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 여성 인물의 외모가 뛰어나다고 묘사하는 순간, 그 인물의 모든 이야기가 ‘뛰어난 외모’와 결부되어서 해석될 가능성이 높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예쁘다’라는 언급은 인물을 납작하게 해석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필터인 것 같다. 최근 발표되는 소설에서는 인물의 외형적 아름다움의 수준(?)을 평가하는 문장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90년대 작품에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해서 소설이 창작되던 시기와 현재의 간격을 가늠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작가가 아무리 예쁘지 않다고 적었어도 독자로서 그 묘사를 믿을 수 없었다. 의선은 여러 장면에서 동물과 유사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중에서도 호리호리한 검은 개 혹은 사슴과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런 사람이 예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래서 아름다울 것이라고 상상하며 읽었다. 의선은 깊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드러나는 외형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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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 얄따란 입술에 언제나 긴장감 있게 맴돌고 있던 침묵은, 이미 죽은 뒤의 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것이었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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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유령이 등장한다! 언젠가부터 유령 이야기 –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의 이야기를 하는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책을 읽다가 인물을 유령처럼 묘사한 부분이 나오면 ‘이 이야기도 유령 이야기구나’하고 반갑다. 사진가 장씨가 광산에서 만난 광부 임씨는 ‘침묵하는 사람’이다.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 – 즉, 유령 같은 존재가 『검은 사슴』에서 많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의선이 있고, 명윤의 동생인 명아도 그렇고, 어쩌면 인영의 어머니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264페이지에서 장씨가 나이트클럽을 다녀와서 하룻밤 함께 자는 여성이 등장한다. 이름, 출신, 직업, 장씨와 하룻밤을 보내는 이유 등 그에 관한 어떤 정보도 생략된 채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검은 사슴』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장면 중에 하나였다. 이 장면을 왜 넣었을까? 그는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처음에는 장씨 아내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브릿지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나 싶었지만, 지금은 어쩌면 그냥 또 하나의 유령(같은 존재)이 아니었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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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평등했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똑같이 암흑 속에 묻어버리고 있었다."
- p.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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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과 「어둠의 사육제」에서도 그랬지만 『검은 사슴』에서도 어둠과 빛에 관한 문장이 많이 나온다. 『검은 사슴』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어둠에 가깝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인영은 어둠 속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어둠 속에서 나는 자랐고, 바로 그 어둠으로 인하여’ 조금씩 강해졌다고.
『검은 사슴』에서 반복해서 다뤄지는 사진과 광산도 어둠과 가깝다. 그렇지만 사진도, 광산도, 완전히 깜깜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소설을 읽으면서 완전히 어둡지만은 않은 어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불을 다 끄고 어둠 속에 있다가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서서히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완전한 어둠과 완전한 빛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일렁이는 순간을 담으려고 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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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살아남았으며, 혼자 남은 사람으로서 강하게 생활해왔다. 튜브를 누군가에게 던져주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았으므로 서른을 넘기도록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어느 누구도 결정적으로 믿지 않았으며,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 p.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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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영과 명윤이 눈 속의 외딴집에 고립되는 <연 지는 골짜기>는 『검은 사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파트 중 하나였다. 인영은 냉정한 사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참는 사람이다. 참고 견디며 안전함을 추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그러나 의선이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외면하지 않고 품는 사람이고, 눈 속 외딴집에 명윤을 혼자 남겨두지 못해서 위험함을 무릎쓰고 함께 고립되는 사람이다. 이런 입체성 때문에 『검은 사슴』에서 인영은 나의 최애캐(릭터)였다.
423페이지에서 '나는 혼자 살아남았으며, 혼자 남은 사람으로서 강하게 생활해왔다.'는 문장은 인영의 삶에서 '살아남은 자'라는 정체성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알려준다. 그러고보니 『검은 사슴』은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같다. 임씨는 '이미 죽은 뒤의 생을 살아가는 사람(247페이지)', 즉,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정의된 지 오래고, 장씨도 임씨와 함께 광산에 매몰되었다가 죽음 직전에 구출된 사람이다. 명윤이 명아를 항상 마음의 짐처럼 생각하고 찾는 이유도 자신은 혜택을 받아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인영과 의선도 모든 가족을 잃고 자신만 살아남았다.
인영은 안전함을 추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마음을 닫고 살아온 것처럼 말하지만, 그럼에도 도움이 필요한 인물을 만났을 때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민다. 살아남은 자의 감각이란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안전함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면서, 누구보다도 불안전함의 위험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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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지는 골짜기> 이후 후반부의 독서기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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