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여수의 사랑』은 표제작 「여수의 사랑」으로 시작한다. 깊은 상처를 지닌 두 여성이 우연히 서로의 곁에 머물게 되고 각자의 여수로 향하는 이야기. 고향을 버리고 상경한 영진이 1인칭 서술자가 되어 베란다라는 벼랑 끝까지 내몰리는 「어둠의 사육제」를 지나 「야간열차」에 다다랐을 때, 앞의 두 작품과 「야간열차」의 결이 미세하게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여수의 사랑」과 「어둠의 사육제」는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여성 화자가 전면에 드러나지만 「야간열차」에서는 '나'라는 호칭이 등장하고 나서 몇 장을 더 읽은 뒤에야 1인칭 서술자가 남성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야간열차」에서는 서술자뿐만 아니라 주요 인물들이 모두 남성이었고 몇몇 여성 인물들은 배경처럼 존재했다. 하나의 단편집에 실려있는 고작 세 편의 단편을 읽었을 뿐인데 이렇게 다르다고? 이런 생각이 들어서 작품이 창작된 시기를 찾아보았다.
단편집 『여수의 사랑』 창작 시기
1)「여수의 사랑」: 1994년 겨울
2)「어둠의 사육제」: 1994년 여름
3)「야간열차」: 1994년 여름
4)「질주」: 1994년 5-6월
5)「진달래능선」: 1994년 3월
6)「붉은 닻」: 1994년 등단작
『여수의 사랑』에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은 창작된 순서와 반대로 실려있었다. 1994년 겨울에 발표된 표제작 「여수의 사랑」부터 작품을 읽어 나가면, 마지막 순간에 1994년 1월 1일,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공개된 「붉은 닻」에 도달했다. 그제야 「어둠의 사육제」에서 「야간열차」로 건너오면서 느꼈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소설을 읽으면서 무언가 변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 「어둠의 사육제」에서 「야간열차」로 넘어가는 방향이 아니라 「야간열차」에서 「어둠의 사육제」로 넘어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흐르면서 창작자가 자신이 원하는 목소리를 조금 더 견고하게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수의 사랑』을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소설집에 실려있는 순서대로 읽으며 한강 작가의 출발을 목격하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고, 다음으로 「붉은 닻」부터 「여수의 사랑」까지 역순으로 읽으면 등단 후 1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그가 변해온 과정을 톺아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중심인물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읽었는데, 다시 읽을 때는 배경에 흐릿하게 자리 잡은 여성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닻」 속 유일한 여성인 어머니는 기다리는 사람이자 머무는 사람이다. 지역 경제를 책임지던 사립 재단이 무너지고 집값이 폭락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마을을 버리고 떠나지만 유일하게 떠나지 않고 그곳에 남는 사람. 어머니는 빈집만 남아 유령 마을처럼 묘사되는 골목에서 문방구를 운영한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꾸벅꾸벅 졸면서 밤늦게까지 카운터를 지킨다. 발이 없는 것처럼 묘사되는 아버지는 어디를 다녀오는지도 모르게 훌쩍 떠났다가 갑자기 돌아오고, 그럴 때마다 그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밥을 먹이고,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어머니다. 떠나고 싶어도 쉽게 떠날 수 없는 사람. 기다리고 머물면서 다른 존재를 돌보고 지키는 사람.
「진달래능선」에는 두 명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첫 번째 어머니는 황막하고 버림받은 것 같은 분위기의 집에서 나무를 태우며 비극적인 삶을 연명하는 사십 대 중반의 황씨의 아내. 그에 대한 언급은 이것이 전부다. '손위인 딸아이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아내가 성한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다는 것.'(p.231) 「진달래능선」에 등장하는 두 번째 어머니도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간다.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견디지 못하고 혼자 도망친 주인공 정환이 고향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 남은 가족은 아무도 없다. 남편이 죽은 뒤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한 어머니가 재혼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먼 도시로 떠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법적인 기록을 찾을 수도 없다. 정환은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어머니와 여동생**이 찍힌 사진 한 장을 들고 전국을 떠돌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질주」에서 인규의 어머니도 같은 이유로 서둘러 재혼한다. 독립된 존재로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을 수 없었던 시대의 여성에게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생존 전략이었는지 보여준다. 재혼 후 둘째 아들 진규가 동네 아이들에게 맞아 죽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가해자들의 집에서 돈을 받아 챙긴 남편이 이번 일은 조용히 넘어가자고,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가스라이팅을 하는 동안, 첫째 아들 인규가 가해자였던 아이들에게 사적 보복을 하는 동안,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남편의 말을 따르고 침묵한다. 남편의 말대로 새 아이를 낳고, 이사를 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은 인생을 산다. 그러던 그가 비로소 말하기 시작하는 것은 50대가 되어 자궁암 진단을 받고 죽음을 기다리면서. 죽기로 결심하고 나서야 "다시 너를 낳고 싶다 진규야", "다시 너를 낳고 싶구나,", "나에게 돌아오겠느냐?"(p.224)라고 울부짖는다.
「야간열차」에는 세 명의 여성 인물이 등장하는데 - 동걸의 어머니, 동걸의 여동생 선주, 그리고 형수 - 그보다 등장하지 않은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붉은 닻」와 「진달래능선」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어딘가 건강하지 않아 보여도 명확한 진단명이 등장하진 않았다. 「질주」에서 (의미심장하게도) 자궁암이라는 병명과 함께 등장했던 어머니는, 「야간열차」에 이르러 처음으로 부재한다. 1인칭 서술자 영현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단출하다. '입대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집안 분위기는 차츰 윤기를 잃어가고 있었다.'(p.155) 어머니는 왜 죽었을까?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정이 '가정답게' 돌아가려면 전통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여성이 한 명 이상 반드시 필요한데 「야간열차」에서 비어있는 어머니의 역할을 계승하는 것은 형수다. 그는 영현보다 한 살 많다고 언급된다. 영현이 군대를 가기 전이니 스무 살 또는 스물한 살 정도 되었다면 형수는 스물두 살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는 집안의 모든 남성이 사람 구실을 하도록 챙긴다.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집으로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필요한 것을 제공하며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존재들을 돌본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집 안의 침묵, 형수가 부엌 한켠에 차려놓은 형님 몫의 밥상, 상보를 들처보면 적요하게 놓여 있는 숟가락과 젓가락, 물이나 들이켜다가 내 방에 들어서면 언제나처럼 입을 벌리고 있을 어둠이 싫었다.'(p.158)는 문장을 보면 영현이 생각하는 '집'에 살아 움직이는 존재는 형수밖에 없다. 실제로 영현의 가족 중에서 따옴표 속 대사로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도 형수뿐이다. 아버지와 큰형, 작은형은 글자로만 존재한다.
「어둠의 사육제」에서도 중심인물 영진의 어머니는 부재하고, 유사-어머니로 이모가 등장한다. 영진은 청주에서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 농촌에서 일곱 자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영진이 가족을 버린 건지, 가족이 영진을 버린 건지 알 수 없는 관계를 뒤로하고 혼자 서울로 올라온 영진에게 가족은 있지만 없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을 때 영진은 마지막으로 이모를 찾아가는데, 영진을 대하는 이모의 태도가 묘하다. 이모는 자식들 등쌀에 영진을 베란다로 몰아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쫓아내지는 않는다. 친정 또는 언니에게 연락할 법도 한데 끝까지 연락하지도 않는다. 남편과 아이들의 눈치를 보지만, 친정 또는 언니에게 연락하지 못하는 여성은 어떤 사연이 있을까? 가정 내에서 그의 위치는 어디일까? 적극적으로 돌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치지도 않는 이상한 모습은 어쩌면 자신도 이중으로 눈치를 봐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은 아닐까?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었다면? 유사-어머니인 이모가 가정 내에서 주체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위치에 갇혀있다면 적극적으로 돌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치지도 '못하는' 행동들이 이해된다.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과 자흔은 모두 어머니가 없다. 어머니만 없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삶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특히 정선의 과거에 대한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다. 정선의 어머니가 스물다섯 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그 뒤에 아버지가 두 딸을 살해한 후 자살***했다는 것. 거기서 유일하게 정선이 살아남았다는 것. 짤막하게 나열된 사실들 뒤로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따라온다. 스물다섯 살에 이미 두 딸이 있는 4인 가정을 꾸렸던 어머니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어머니의 죽음 후 아버지는 왜 아이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고 했을까? 무엇이 이 가정을 이렇게 몰고 갔을까? 소설은 정선이 자흔을 만난 후 어떤 자극을 받고 PTSD에 시달리는 모습에 초점을 맞출 뿐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자흔은 두 살 때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누구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자흔의 어머니가 자흔을 버린 이유 역시 알려진 것이 없다. 「야간열차」나 「어둠의 사육제」에서는 어머니가 부재한 상태에서 다른 여성 인물이 유사-어머니 역할로 기능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드러난 장면들을 통해 조금이라도 짐작하면서 읽으려고 노력했다면, 「여수의 사랑」에서는 확실하게 드러난 사실이 거의 없었다. 정선과 자흔의 어머니에 대한 정보는 왜 이렇게나 철저하게 비어있을까? 어쩌면 비어있는 부분의 이야기를 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워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 비어있는 부분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것 같은 예감도. 그래서 전형성에 기대어 쉽게 짐작하기보다, 그보다 더 복잡한 사연이 있을 거라고 믿고 알 수 없음의 상태를 유예하기로 했다.
「여수의 사랑」은 정선과 자흔의 생물학적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주는 것이 없지만, 상징적인 의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를 한다. 첫째, 가부장제 시스템이 강요하는 정상성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서로에게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정선과 자흔은 각자의 이유로 가부장제 시스템이 강요하는 정상성에서 미끄러지는 인물이다. 가족(과 기억)의 유무, 사회적 지위, 교육 수준, 위생 관념 등 많은 부분에서 두 사람은 아주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발견하고 곁을 내어준다. 서로의 약하고 아픈 부분을 목격하고, 보듬어주고, 들어준다. 두려움에 떠는 정선이 자흔의 품에 안겨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린 어머니의 아련한 품속처럼, 수천수만의 물고기 비늘들이 떠올라 빛나는 것 같았던 봄날의 여수 앞바다처럼 자흔의 가슴은 다사롭고 포근하였다.'(p.62)라고 말할 때 자흔은 정선이 잃어버린 어머니이자 고향이자 여수가 된다.****
둘째로 자흔은 생물학적 어머니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어머니로서의 자연을 이야기한다. 어릴 적 버려졌던 기차가 여수에서 출발하는 차편이었기 때문에 그는 막연하게 자신의 고향이 여수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그곳에 가는 날만을 기다린다. 자흔이 여수를 꿈꾸고 여수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곧 어머니를 꿈꾸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모습이다. 자흔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p.28)다고 말하는 순간 여수는 모든 존재의 어머니가 된다. 소제마을에 도착한 자흔이 거추장스러운 몸을 벗고 자연과 몰아일체되는 장면에서, '그러니까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p.57)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여수'는 하나의 지역을 가리키는 한정 명사가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는 자연까지 확장된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정리하자면 「붉은 닻」과 「진달래능선」, 「질주」에서 어머니는 살아 있지만 유령 같은 존재이다.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결혼제도와 가부장제 사회에서 요구하는 어머니상에 의존하면서 자신보다 다른 존재를 돌보기 위해 애쓴다. 「질주」에 이르러서야 죽음에 이르는 질병과 정신이상의 상태를 빌려서 울부짖는다. 1994년 여름 이후에 발표된 「야간열차」와 「어둠의 사육제」, 그리고 「여수의 사랑」에서 중심인물의 생물학적 어머니는 부재한다. 대신 유사-어머니의 이미지는 형수(「야간열차」)와 이모(「어둠의 사육제」)를 거쳐 또래 여성과 자연(「여수의 사랑」)으로까지 확장된다. 여섯 편의 단편 속에 유령처럼 자리하거나 부재한 어머니와 그를 대신하는 존재들을 통해서 어머니의 부재에 대응하는 실마리를 보여주는 것 같다.
*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 실려있는 단편들은 모두 1인 또는 2인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수의 사랑」에서는 정선(여성)과 자흔(여성), 「어둠의 사육제」에서는 영진(여성)과 명환(남성), 「야간열차」에서는 영현(남성)과 동걸(남성), 「질주」에서는 인규(남성), 「진달래능선」에서는 정환(남성)과 40대 중반의 사내, 「붉은 닻」에서는 동식(남성). 「여수의 사랑」에서는 병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의사와 가족을 죽이는 아버지가 잠시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남성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데 비해 「어둠의 사육제」에서는 여성(영진)과 남성(명환)이 중요한 두 축을 하나씩 나누어서 전개하다가 「야간열차」부터는 모두 남성 인물의 목소리로만 이야기가 전개된다. 중심인물의 생물학적 성별에 집중해서 읽는 것이 납작한 독해법일 수 있지만 『여수의 사랑』을 처음 읽을 때는 이 부분이 가장 도드라져 보였다. 납작한 읽기도 여러 겹이 쌓이면 다양한 층위의 읽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한 겹을 더하는 마음으로 읽어보았다.
** 「진달래능선」에서 아버지의 폭력이 오빠 정환과 여동생 정임을 통과하면서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그려지는 것도 흥미롭다. 정환은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한 뒤 자신보다 약한 동네 아이들에게 때리며 폭력을 대물림한다. 반면에 정임은 폭행을 당한 뒤 유일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자신의 몸에 매달려 폭식을 하고 토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정환은 약육강식의 논리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본능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전환시킬 수 있지만(이 과정을 불쾌하게 여길지라도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정임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거나 그럴 수 없어서 먹는 행위로 전환시킨다. 정환이 집을 나가기로 결심한 장면도 의미심장한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반죽음이 되도록' 때리는 것을 말리다가 다음 타겟이 될 뻔한 두 사람은 진달래능선으로 도망친다. 어느 정도 도망치다가 정임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보채는 걸 참지 못하고 결국 정환은 그의 뺨을 때리고 만다. 혼자서 집을 찾지 못하는 정임이 숲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 정환에게 어머니는 '넌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선을 긋는다.
*** 『여수의 사랑』 마지막에 실려있는 해설 <'되삶'의 고통과 우울의 내적 형식>에서 이 부분을 '정선은 아버지의 동반 자살로 인해 여동생을 잃고 혼자 살아남고'(p.309)라고 표현한 부분은 유감이다. 과거에는 이런 사건을 '동반 자살'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부모가 일방적인 판단으로 아이들을 죽인 행위를 미화한 표현으로 보고 '자녀 살해 후 자살' 또는 '비속 살해'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2012년에 개정되면서 실린 글로 보이는데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가는 만큼 이 부분도 정정되길 바란다.
**** 62페이지의 장면 때문에 정선에게 자흔이 어머니였다는 것은 확신하게 되는데, 자흔에게 정선도 그런 의미일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하면 조금 더 고민하게 된다. 갈 곳이 없었던 자흔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정선도 비슷한 역할을 한 순간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정선의 심리상태가 불안해지면서 자흔이 떠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도 생각한다. (품는 것만이 아니라 떠나(게 만드)는 것까지 ‘어머니’라고 봐야할까...?) 마지막 장면에서 정선이 여수로 내려가는 장면이 결국은 자흔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둘의 관계가 닫히지 않고 끝까지 열려있다고 희망을 가져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