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레터]는 [바다]와 [육지]로 구성했습니다. 5월 상현달 레터의 [바다]에는 『그대의 차가운 손』을 읽고 느꼈던 감상과 생각을 담았습니다. [육지]는 한 번 쉬어가고, 5월 하현달 레터에서 『그대의 차가운 손』을 읽는 동안 작성했던 독서노트 기록을 모두 담을 예정입니다. 하나의 독서 경험이 다른 경험과 연결되길 바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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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은 한강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2002년에 출간되었다. 이야기는 누가 보아도 한강 작가를 연상시키는 소설가 H가 우연히 장운형이라는 조각가를 알게 되면서 시작한다. H는 일부러 의도한 것도 아닌데 짧은 기간에 그의 작품을 세 번이나 연달아 발견하면서 장운형이라는 조각가에게 흥미를 가진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그 뒤로 H와 장운형 사이에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지만… H는 어느날 갑자기 증발해버린 장운형이 남긴 글을 전달받고, 그 글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다 한 뒤 마지막 에필로그가 나올 때까지 사라진다. 장운형이 남긴 글은 그가 어떤 가정에서 자랐고,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창작을 이어온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특히 라이프캐스팅 기법을 이용해 석고로 타인의 신체를 떠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가 주로 집착했던 모델이었던 L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L이 떠난 뒤에 E를 발견하고 다시 그의 몸을 뜨다가 무언가 깨달은 두 사람은 함께 사라진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소설가 H가 우연히 알게 된 조각가 장운형의 이야기를 다시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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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과정은 여러 모로 흥미로웠다. 좋은 의미보다는 그 반대의 의미로.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는 순간도 몇 번 있었고,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장면이나 마음에 걸리는 표현이 나오는 부분도 있었다. 왜 장운형이라는 인물을 선택했을까? 왜 하필 그의 시선으로 L과 E를 그리도록 만들었을까? 장운형은 괜찮은 인물인가? 혹은 안 괜찮은 인물인가?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할지 고민한 순간이 많았는데도 끝까지 읽은 이유는 『그대의 차가운 손』이 『내 여자의 열매』와 『채식주의자』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한강 작가의 식물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히는 두 권의 책 사이에 『그대의 차가운 손』이 끼어있다면, 작가가 분명히 비슷한 결의 질문에 매달리던 중이었을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대표하는 세계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원인을 명확하게 알아보고 싶기도 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책을 여러 번 들었다놓았다하다가 의외의 장소(?)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마침 에밀리 브론테의 『워더링 하이츠』를 함께 읽고 있었다. 『워더링 하이츠』에는 넬리(엘런 딘)이라는 중간 서술자가 나온다. 그는 보모 역할을 맡아 워더링 하이츠에 거주하는 언쇼 가문과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거주하는 린튼 가문의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는 과정을 모두 지켜본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록우드라는 최종 서술자에게 전한다. 『워더링 하이츠』는 넬리의 서술을 들은 록우드가 서술하는 버전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는 결과적으로 두 명의 인물을 통과하고 남은 버전을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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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문의 이야기 → 넬리(엘런) 딘 → 록우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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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더링 하이츠』속 메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이지만, 이번에는 유독 넬리가 눈에 들어왔다. 넬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을 이야기할 때는 노골적으로 애정을 드러내고, 싫어하는 인물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태도를 바꿔 냉정해졌다. 주인공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순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어린 캐서린이 집 밖으로 산책을 나가고 싶어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을 때도 있지만, 히스클리프가 집 근처에 다가와서 염탐하는 걸 모르는 척 할 때도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는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처럼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관찰자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모습. 이런 면모를 통해서 넬리가 결코 객관적이지 않은 서술자라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독자는 넬리가 전달하는 이야기를 조금 더 신중하게 읽어야 했다. 넬리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지, 혹은 어디까지 의심하며 읽을지, 넬리의 서술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어떤 것일지 의심하면서.
『그대의 차가운 손』도 『워더링 하이츠』와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독자는 결국 두 명의 인물을 통과하고 남은 버전의 이야기를 읽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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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리가 편파적이고 주관적인 서술자였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 장운형의 서술을 받아들일 때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장운형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혹은 어디서부터 의심하며 읽어야 할까? 장운형이 편파적이고 주관적으로 판단한 부분이 있을까? 넬리처럼 애정을 담은 장면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자신이 생각했을 때도 마음에 걸리거나 외면하고 싶은 내용은 생략한 곳도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장운형의 서술에서 굴곡진 부분들이 보였다. 회고록을 시작하는 지점에서 자신의 유년기를 설명할 때는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설명한다고 느꼈다. 어릴 때 외삼촌의 손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가족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출산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장운형은 아주 어릴 때 했던 생각을 바로 며칠 전의 일처럼 매우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예술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무리 중요한 내용이라고 해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이전에 있었던 일과 그 순간 느낌 감정을 그렇게 강렬하게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진 않다.
그와중에 언급하지 않고 슬리슬쩍 넘어가는 내용도 있다. 장운형에 따르면 ‘손’이라는 신체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외삼촌이었는데, 그런데 정작 창작 과정에서는 오직 여성의 신체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왜? 그가 풀고 싶었던 인간의 껍데기가 품고 있는 비밀은 여성의 껍데기에 한정된 것인가? 어머니의 출산 장면 이후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면 L과 E의 신체를 어머니 신체의 다른 버전으로 본 것인가? 자신의 예술 세계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설명할 때는 뜨거운 감정들을 생생하게 토로하던 장운형이 다른 부분에서는 말을 아낀다. L을 모델로 라이프캐스팅을 여러 번 진행하는 과정에서 장운형은 시종일관 굉장히 프로답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어느 순간부터는 L과 잔다. L이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누군가를 갈구하며 관계를 원한 것처럼 묘사되지만, 정작 함께 잔 장운형이 L과의 관계를 원했는지(원했다면 언제부터?), 이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E와의 관계에서도 되풀이된다. 장운형의 이야기에는 공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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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석고 조각의 이음새를 과장했다. 누구나 그 빈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손목 쪽의 입구를 바깥으로 부풀렸다.
손은 완벽하게 재생되어 있었다. 오직 한 가지, 그 안의 비어 있는 공간을 제외한다면, 누구라도 만져보고 싶을 만큼 정교했다. (…) 어떤 형상들보다 강렬하게 그 손은 실재하고 있었다. 어떤 생명을, 숨결을 훔쳐 감쪽같이 내 것으로 만든 듯한 전율을 나는 느꼈다.
그러나 뻥 뚫린 손목의 입구로 들여다보는 캄캄한 공동 속에는 혈관도 근육도 뼈도 없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본질이 제거된 공간이었다. 그 때문에 그 손에서는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섬뜩했고, 차가웠으며, 비인간적이었다.’
- 『그대의 차가운 손』, p. 90-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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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캐스팅 기법을 주로 사용하는 김일용 조각가의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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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집중적으로 그려지는 창작 방식이 라이프캐스팅Lifecasting이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라이프캐스팅은 인체의 형상을 모방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실물을 그대로 뜨는 방식을 의미한다. 본래는 기계적으로 원형을 모방, 복제하는 행위라고 생각해서 예술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1960년대부터 소수의 조각가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고 한다. 현재는 라이프캐스팅 기법을 이용해 우리 주변에 있는 인물, 사물을 표현하고 소외되거나 잊혀지기 쉬운 현대인의 모습을 재현하는 작품들이 많다고. 장운형도 자신이 선택한 모델의 신체 일부를 석고로 뜰 때 그 인물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있기를 원했다. Lifecasting이라는 표현 그대로 L과 E처럼 흥미로운 인물을 석고로 뜨면서 그들의 삶, 생명(의 본질)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삶을 자기만의 예술 방식으로 담아내려고 하는 행위.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장운형과 H가 묘하게 포개어졌다. 장운형이 석고를 활용한 라이프캐스팅으로 이것을 실천하고 있다면, H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활용해 이것을 실천하는 인물이다. H는 문학으로 인간을 이야기한다. 그와중에 장운형이라는 흥미로운 인물을 알게 되었다. 장운형이 남긴 글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읽고 액자식 구성으로 옮겼다. 실제로 장운형이 쓴 내용이 어디까지이고, H가 수정하거나 의도적으로 각색한 부분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H는 장운형의 이야기를 옮겨서 장운형이라는 인물을 담아낼 뿐이다. 그리고 장운형의 작품이 그러하듯이, H의 이야기에도 공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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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자의 손아귀에 잡힌 여자의 흰 손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껍데기였다. 흔적에 불과했다. 이미 그것은 손이 아니었다. (…) 나는 얼굴 없는 남자의 찢어진 목덜미 속을 보았다.
그 안은, 시커멓게 비어 있었다.
마치 벗겨낸 가죽을 기워놓은 것처럼, 작가는 조각조각 나누어 뜬 석고의 껍질들을 붙여놓았다. 필시 고의적으로, 섬세하게 이음선을 다듬는 대신 오히려 덕지덕지 석고를 덧이겨놓았다. 마치 거꾸로 솔기가 보이도록 박은 옷처럼.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일그러진 괴인간처럼, 폭사한 시체를 수습해 꿰매놓은 것처럼.
(…) 두서없이 나는 몇 달 전 어머니를 염습할 때 보았던 매미 껍데기 같은 몸을 떠올렸고, 이모의 일그러진 반쪽 얼굴을 떠올렸고, 문득 생각했다.
결국, 그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건 누더기 같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의 컴컴한 공동(空洞)이었는지도 모른다.’
- 『그대의 차가운 손』, p.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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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캐스팅 기법을 주로 사용하는 김일용 조각가의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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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페이지에서 H가 장운형의 작품을 보고 이야기하는 문장들은 독자가 H의 글을 바라보는 시선과 닮았다. ‘작가는 조각조각’ 나누어진 이야기를 기워붙인다. ‘필시 고의적으로,’ 빈틈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어딘가 찢어지고, 구멍이 나고,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여러 의문을 남긴 채. 정작 내가 궁금했던 부분은 ‘시커멓게 비어 있’을 수 있는데, 바꿔 말하면 ‘그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건 누더기 같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의 컴컴한 공동(空洞)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예술이든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고, 껍데기를 통해 보여지는 비어있는 부분이 의미하는 바를 고민하며 한 번 더 들여봐야 한다는 것.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 드러나지 않는 공백들 중에서 여전히 궁금한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L은 장운형을 떠나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치료를 받게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E는 어떤 과거를 지나왔을까? H는 무슨 이유로 아팠을까? H가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 H는 어떤 글을 썼을까? 이야기에 기반을 둔 이런 질문들은 나를 조금 더 큰 질문으로 이끈다. 왜 이 이야기 속에서 L과 E와 H는 이니셜로만 존재할까? 자기 이야기를 회고록 방식으로 펼쳐내는 장운형과 비교해서 L과 E, H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워더링 하이츠』에서 여성 중간 서술자의 이야기가 신뢰받는 위치의 남성 서술자를 통과해 세상에 알려지도록 만들었다면, 『그대의 차가운 손』에선 남성 중간 서술자의 이야기가 여성 서술자를 통해 세상에 나오도록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열심히 읽고 치열하게 고민해 보아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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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육지] 코너는 쉬어갑니다.
5월 하현달 레터에서
『그대의 차가운 손』 독서노트 기록을 확인하실 수 있어요.
5월 19일까지 『그대의 차가운 손』을 완독하고 만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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