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레터]는 [바다]와 [육지]로 구성했습니다. 4월 하현달 레터의 [바다]에는 「내 여자의 열매」를 읽고 느꼈던 감상과 생각을 담았습니다. [육지]에는 『내 여자의 열매』를 읽는 동안 작성했던 독서노트 기록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하나의 독서 경험이 다른 경험과 연결되길 바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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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을 좋아한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1층에만 작은 테라스 겸 정원이 있는데, 이사를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사를 고민하면서 두 번이나 집을 보러 왔는데 올 때마다 테라스에 고양이가 쉬고 있었다. 고양이신이 지켜주는 집이라니 어떻게 안 올 수가 있담...)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블라인드를 걷는다. 베란다 창 너머에 자리잡은 식물과 동물들을 관찰한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같이 사는 고양이와 함께.
그러던 어느날, 관리사무소 직원분이 테라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시더니 정원의 나무 중 일부를 잘라내려고 했다. 아파트 화단 수목 정리를 할 거라는 공고가 붙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전기톱이 나무에 들어가기 전에 그 광경을 목격했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창문을 열고 잠시만요, 하고 외쳤다. 나무를 왜 자르냐고 물어보니 관리실에서 심은 것이 아니고, 어디선가 혼자 날아와서 자란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 자르려고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실 그 나무는 『하루의 책상』에서도 언급했던, 매일 보며 정이 많이 든 때죽나무였다. 나무가 조경을 해치지도 않고, 높이도 많이 높지도 않은데 안 자르시면 안 될까요?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1층과 2층 거주자들이 동의한다면 남겨놓겠다고 하셨다. 대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2층 베란다의 창문이 열렸다. 이 나무가 있어서 좋은데요, 자르지 말아주세요. 때죽나무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날의 대화에서 '이 나무는 어디선가 혼자 날아와서 자란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찾아보니 때죽나무는 공원이나 낮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였다. 근처에 같은 종류의 나무가 있다면 거기에서 씨앗이 옮겨온 것이 아닐까 싶어서 집 앞 정원을 기준으로 가까운 화단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비슷한 나무를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 나무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이렇게 자랄 때까지 혼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뎠을까? 궁금증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산책을 할 때마다 나무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심은 나무들도 있지만,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는 나무들도 많았다. 바꿔말하면, 어떤 나무들은 스스로 이동을 한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아도 다른 식물과 동물, 자연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함께 어울려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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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의 열매」는 한강 작가의 세 번째 책이자 두 번째 소설집의 표제작이다. '아내의 몸에서 피멍을 처음 본 것은 늦은 오월의 일이었다.'로 시작하는 39페이지짜리 단편소설은 남편 '나'가 아내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며 이야기를 끌고 간다. 소설의 초반, 아내는 몸 여기저기에서 이상한 멍들이 발견되는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 '나'는 병원에 가보라는 다그침을 남기고 아내도 그 말을 따르지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나무가 된다. 아내의 몸이 나무로 변한다. '나'는 아내를 화분에 옮겨심고, 물을 주고, 열매를 따먹는다.
사실 「내 여자의 열매」는 아는 소설이었다. 불량소녀 독서단이라는 독서모임에서 한강 작가의 전작을 순서대로 읽으면서 접한 초기작들(『여수의 사랑』 -> 『검은 사슴』 -> 『내 여자의 열매』)은 대부분 처음 읽는 것이었는데, 「내 여자의 열매」는 그중에서 유일하게 읽어본 작품이었다. 2016년 『채식주의자』가 부커상을 탔을 때 이 작품이 『채식주의자』의 씨앗 같은 작품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 읽었고, 작년에 다른 독서모임에서 민음사에서 나온 『한국여성문학선집』을 읽으면서 90년대 대표작으로 실려있는 것을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러니까 따져보면 이번이 세 번째 읽는 셈이었다.
아는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이전과 다르게 읽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어떻게 하면 이전과 다를게 읽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와중에 나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더이상 나무를 수동적인 생명체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여자의 열매」에 드러나는 식물성도 다르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내 여자의 열매」에서 도영*은 자신의 몸을 적극적으로 관찰한다. 이것은 도영이 그만큼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라서 가능하다. 도영이 어머니에게 털어놓는 편지 형식의 글을 보면, 어릴 적부터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예민하게 알아차린다. 주변 인물들의 감정과 분위기까지 빠르게 읽어내고 그것에 영향을 받는다. 이런 섬세한 감각 덕분에 도영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알아차린다. 소설은 도영이 어느 날 남편에게 자신의 몸을 봐달라고 이야기를 꺼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편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기 전까지 도영이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는 생략되어 있다. 그렇지만 도영이 섬세한 감각과 뛰어난 관찰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고 알아차렸을 것이다. 신체적 변화와 함께 마음의 상태가 변해가는 과정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섬세한 감각과 알아차림은 능동성이 자라나는 중요한 토양이 된다.
게다가 도영은 도움을 요청한다. 남편의 나레이션을 통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눈 대화들을 살펴보면, 도영은 남편이 자신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도영이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어떤 미래를 그리는지 이야기를 할 때도 남편은 자신의 외로움에 집중하고, 화초를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영은 남편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준다. 가장 내밀한 부분을 보여주고 도움을 요청한다. (물론 그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영은 제 발로 병원을 찾아가기도 한다.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모두 내어주고 관찰할 기회를 준다. (물론 그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 이것 역시 수동적인 인물의 행동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도영은 식물이 된다.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무엇이 되는 것만큼 놀라운 일이 있을까? 식물-되기를 능동적인 과정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 여부를 결정하려면 도영이 그것을 원했을지부터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최근까지 도영은 현대 사회에서 강요되는 정상성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힘들어했고 떠나고 싶어했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각과 관찰력을 지니고 있지만 평범한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동안 그것을 혼자만 간직하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그러나 식물화가 진행되면서 그것을 참을 필요가 없어졌다. 심지어 식물이 되면서 그동안 억지로 참고 억눌러야 했던 감각들이 인간의 영역을 넘어설 정도로 극대화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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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지요 어머니.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고 맛보는 것이 없어도 모든 것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져요. (중략) 비 내리기 전이면 비옥한 꿈에 젖어 있는 대기를, 안개를 품은 새벽하늘의 희부연 빛을 나를 느껴요.
가깝고 먼 곳에서 싹이 돋고 잎이 피는 것, 애벌레들이 알을 깨고 나오고, 개들과 고양이들이 새끼를 낳고, 옆동 노인의 맥박이 멈출 듯 멈출 듯 멈추지 않고, 윗집 주방의 냄비에 시금치가 데쳐지고, 아랫집 전축 위에 놓인 항아리 가득 허리 잘린 국화 다발이 꽂히는 것을 느껴요. 낮이나 밤이나 별들은 유연한 포물선을 그리고, 해가 뜰 때마다 간선도로변 플라타너스들의 몸은 간절히 그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내 몸도 따라서 그쪽으로 활짝 펼쳐져요.
이해할 수 있으세요? 이제 곧 생각할 수도 없게 되리라는 걸 알지만 나는 괜찮아요. 오래전부터 이렇게 바람과 햇빛과 물만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꿈꿔왔어요.'
- 『내 여자의 열매』, p.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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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도영은 오랫동안 자신이 꿈꿔왔던 그것이 된다. 그것이 되기를 선택한다. 무엇이 '된다'고만 표현하면 표현 자체가 수동적으로 느껴진다. 주체는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되어버리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도영이 어느날 갑자기 '식물이 되었다'고만 표현하면 그의 변화가 수동적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은 오랜 기간 동안 도영이 현재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 자신을 알아차렸고, 그것을 꿈꿔왔다면 어떨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완전히 다른 무엇이 되는 것- 어쩌면 도영의 능동성이 최대로 폭발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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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것은 또 다른 오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오독을 하고 싶다. 「내 여자의 열매」를 읽는 동안 독자는 남편의 서술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후반부에 어머니를 호명하며 도영의 목소리가 강렬하게 터져나오기 전까지, 도영의 몸과 정신, 마음을 짐작하기 위해서 남편의 눈을 빌릴 수밖에 없다. 그게 너무 답답했다. 왜냐하면 남편은 도영을 절대로 읽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도영을 모른다. '나'는 도영이 왜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지 모르고, 왜 피를 갈고 싶어하는지 모르고, 그럼에도 왜 떠나지 않고 남았는지 모르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나'에게 도영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일 뿐이다. 심지어 소설은 '나는 그것을 잘 알 수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 나는 독자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서술자를 믿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내 여자의 열매」를 읽고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채식주의자』와 연결시켜서 연구한 논문들이 대부분이었다. 『채식주의자』까지 읽고 나서 읽으려고 다음으로 미뤄두고, 『한국여성문학선집』 집필진 중 한 분이신 김양선 교수님이 쓰신 글만 읽었다. <고통스러운 식물성의 세계를 직조하는 여성의 글쓰기>**라는 글에서 '식물-되기를 통해 아내는 "이 집을 떠나"고자 한다. 하지만 초월과 환상에 다름 아닌 이 욕망은 좌절된다. 좁고 딱딱한 화분 속에 갇힌 식물-아내는 진딧물을 잡아주고, 새 흙으로 갈아주고, 물을 부어주는 따위의 남편의 돌봄을 통해서만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 작품 속 식물-되기가 욕망의 좌절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남았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도영은 정말 남편의 돌봄이 없으면 죽을까? (모든 인간은 돌봄을 통해서 살아있는 것 아닐까?) 식물이 죽는다는 건 무엇을 기준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남편이 다음 열매를 어딘가에 심는다면, 여러 화분으로 나눠 심는다면 그 식물은 죽은 걸까,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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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여자의 열매」는 남편 '나'의 시선에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된다. 소설 속에서 종을 뛰어넘는 엄청난 변신을 하는 인물을 '나'의 아내이지만, 그는 '아내'라는 호칭으로만 언급된다. '아내'라는 호칭이 한 사람을 결혼한 여성이자 남편의 배우자의 위치에만 한정시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음대로 이름을 상상해보았다. 소설 속에서 '아내'를 묘사한 내용을 살펴보면 왠지 그는 사과나무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되었는데 사과나무를 연상하는 한자가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5월부터 아내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고, 이후 열매가 열렸다는 설정이 나오기 때문에 여름에 열매가 열리는 나무들을 검색해보니 매실, 자두, 살구, 복숭아 같은 나무들이 나왔다. 그중에서 복숭아 도(桃)자를 따서 도영이라고 가상의 이름을 붙였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열매를 묘사하는 걸 보면 실제로는 매실이나 자두 나무에 가까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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